독서 감상문

'자기 앞의 생'을 읽고

blueshirt 2018. 5. 21. 11:47

<이전에 적어놓았던 독서감상문 입니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生 표지

책을 읽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독서기록장에 느낀점들을 적었고, 이를 다시 원노트에 정리하는 중이다. 다 읽은 날은 목요일, 오늘은 하루 다음 날인 금요일.

 오랜만에 책 한권을 읽은 것 같다. 2주 정도 걸린 것 같은데, 아마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2주 조금 안되었을 것이다. 엄마한테 무슨 책을 읽을지 추천 받아 읽은 책이었다.

 장편 소설인데, 일종의 수필 같은 책이다. 모하메드(이하 모모) 시점에서 바라보는 삶을 10살에서 14살까지 적은 책 같았다. 물론 모모가 4살을 훌쩍 먹게 된 날은 하루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왜 인지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야기 속 의사선생님과 모모를 키워준 아주머니는 모모에게 10살이라고 말하다가, 이야기 후반부즈음 아버지가 나타나 모모 자신이 14살임을 알게된다. 모모는 하루만에, 그것도 몇 시간 만에 4살을 먹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양육되는 아이다. 이야기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년 정도 지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책에서 말하길,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창가에서 일하는 성노동자(책 속에서는 창녀라 표현된다.)가 아이를 나으면, 정부는 엄마와 아이를 결별시켜 아이를 빈민구제소로 보낸다고 한다. 로자 아줌마의 어린이집은 아이를 빈민구제소로 보내고 싶지 않은 엄마들이 아이를 보내는 곳이다. 이야기를 읽어보니 로자 아줌마의 어린이집은 아이가 15살이 되기 전까지, 태어났을 때부터 기르는 아이들이 꽤 많은 곳 같았다. 다른 집으로 입양되는 아이도 있는 것 같았고, 고아도 있는 것 같았다. 모모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어린이집에 맡겨졌고, 14살이 될 때까지 로자 아줌마에게 길러졌다. 책의 이야기는 이런 모모가 바라보는 풍경과 자신의 감정들이다.

 기억나는 등장인물에는 주인공 모모와 여러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는 로자 아줌마, 마음씨 좋은 카츠 선생님, 모모의 인생 선생님 겸 친구인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많이 도와주는 여장남자 룰라 아줌마 등등이 있다. 좋은 이웃들이 많은 것으로 기억나는데, 글을 적는 지금 시점에 이름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모모는 아랍인,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다. 모모는 또래보다 좀 더 똑똑한 아이, 로자 아줌마는 과거에 성노동자였고, 지금은 나이를 먹어가는, 뇌와 관절과 혈관에 문제가 생겨가는 할머니이다.

- 결말
이 글을 쓰는 시점은 7시 반 양재역을 출발하여, 종로 3가역을 지나 안국역을 진입하기 전이었다. 책을 읽는 종종 비참하고, 슬펐다. 책의 결말은 곧 다가오는데, 파도가 몰려올 것만 같았고, 나는 어디 즈음 왔나 생각에 3호선 지하철 안내 전광판을 올려다보니 종로 3가역이었다.

 이 책의 결말이 다가온다는 것은 점점 아픔이 다가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등장인물 모두와의 결별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책의 결말은 로자 아줌마의 깊어가는 병, 로자 아줌마의 죽음과 생을 바라보는 모모의 애정이 있었다. 로자 아줌마는 결국 지하실에서 숨을 멈추게 되는데, 모모는 이미 죽어간 시체 앞을 두고도 로자 아줌마의 삶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못한다. 

 심해가는 악취, 썩어가는 살, 파랗게 질려가는 눈 주변이 있었고, 늘어나는 향수, 타들어가는 지하실 촛불, 색조가 짙어지는 화장품들이 있었다. 자연의 법칙에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까지 하며 모모가 로자를 붙잡아 두고자 하는 모습에 나는 모모가 무기력해보였다. 향수 한통을 들이붓는다 해도 살결의 향이 다시 올라올 것 같지 않았고, 밝은 촛불을 들이 댄다 하더라도 썩어가는 살 속에 새살이 돋을 것 같지 않았고, 붉은 색조를 칠하더라도 혈색이 돌아올 것 같지 않음에도, 나는 모모와 같이 향수를 붓고, 촛불을 키고, 죽은 얼굴에 화장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루 아침에 14살이 되더라도, 이야기에서 들리는 모모의 목소리는 10살 꼬마 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10살인 줄 알았던 모모가 14살임을 스스로 알았을 때, 늘어난 4살에 기뻐하던 모모는 마치 "나는 14살이니 할 수 있어.", "난 14살이니까"라며 스스로 되니이며 무력감을 외면해보이려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로자 또한 그러했다. 이야기 속 사회는 안락사를 금지하는 사회였고, 아직 태어나기 전의 아기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사회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생을 갈아마시게 하는 사회 속에서 생을 마주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로자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안타깝고 측은하며, 고통스러움에도 나는 그녀가 가지 않았으면 했다.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겠으나, 그러했다. 그녀의 단어를 읽는 것은 두 눈이지만,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는데, 책장의 한 장, 한 장을 넘길 수록 그 아줌마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모모가 신기해했던, 영화 필름, 영사기의 되감기 기능이 절실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수록 맨 마지막 페이지의 쪽수가 늘어나, 로자의 목소리를 계속 듣을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되감기라도 절실했다. 절실했던 만큼 다행이라 느꼈다. 다행히도, 나는 책 속의 인물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이므로, 첫 장부터 다시 읽어 되감을 수 있었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이 모모의 풍경 전부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꺼져가는 생을 보며 추해진다는 것과 안타까움, 무력감과 슬픔, 잠시 동안은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모모와 이미 꺼진 생을 바라보고도 애정을 품는 모모를 보며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은 에밀 아자라르의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모모의 일기장 같았다.   

 오랜만에 책을 읽어서 그런가, 초등학교 때부터 왠지 모르게 책을 읽으면 교훈이라는 것을 찾아야할 것 같은 기분인데 교훈이란 것을 굳이 찾거나 만들고 싶지 않다.

+ 이 책은 읽는 동안 상상이 정말 잘되는 책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살았던 7층짜리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는 어떤 형태의 아파트일지, 그 지하실은 어떻게 생겼을지, 모모의 목소리와 로자의 목소리, 카츠와 하밀의 목소리, 이웃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어떻게 생겼을지 그려지는 책이다.  의사 선생님 카츠는 영화 '캡틴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에서 나오는 캡틴을 만든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밀 할아버지는 왠지 마르고, 말라서 핏줄이 생생한 손등, 검은 단추 조끼를 입고 있을 것 같았다. 머리는 백발의 주변머리만 남았을 것 같다. 모모는 그 어떤 아랍 꼬마여도 괜찮을 것 같다. 아랍 꼬마를 본 적이 나는 잘 없으니까 아마 상상이 되지 않나보다. 로자 아줌마는 책 만큼이나 잘 표현할 수가 없다. 머리는 서른 가닥 정도 남았다까지 서술되니 그저 읽으면 그려진다. 7정거장만 가면 대곡역이다. 나는 지금 구파발역에 있고, 14분 정도면 지하철에서의 결말은 끝이 난다. 


자기 앞의 生 표지 이미지 출처 :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