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 메타 인지 편
전치형·홍성욱, 미래는 오지 않는다 - 과학기술은 어떻게 미래를 독점하는가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 내 생각엔 이런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 기술만이 답이다! 기술만능주의자
- 올 기술은 언젠가 오고 말 것이라는 기술운명론자
- 미래예측신봉자
- (좁게는) 공학자, 과학자, (넓게는) 오늘날 미래예측에 언급되는 온갖 분야의 종사자들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혹은 하게될) 사람들이 꼭 한번은 읽어봤으면 한다. 삶의 기반에 과학기술이 자리잡은 오늘날 이들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인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전공서적에서는 쉽사리 접해보지 않았을 질문들을 던져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본인의 전공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과학기술:메타 인지 편 이랄까. 나는 저 중 기술만능주의자에 기술운명론자이자 공학에서 일하게 될 사람이니 내게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메타 인지 :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왜 근래의 미래예측은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다뤄질까?’, 둘째는 ‘누가 하는 미래예측이며, 누가 등장하는 미래예측인가?’ 이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라는 책은 이 2가지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며, 질문에 답을 하기보다는 질문이 담고 있는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한다.
문제의식이라 하여 책이 무거울 법하지만, 사실 무척 재미있는 편이다. 여러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는 편인데, 마치 ‘야밤의 공대생 만화’ 활자판을 읽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논리는 탄탄하다.
위 질문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책은 1장에서 ‘미래예측’이란 것에 대해 논한다. ‘도대체 미래예측은 뭔지’, ‘왜 자꾸만 틀리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왜 자꾸 나오고 또 믿을만 하게 느껴지는지’ 이런 이야기를 한다. 1925년에 상상한 21세기 뉴욕의 미래 상상도부터, Y2K 신드롬까지 과거의 미래예측이 틀렸던 사례를 이야기하고 , 과연 예측이란 무엇인가를 논한다. 주식시장 예측은 침팬지가 더 잘한다는 실험결과도 보여주고, 하나의 예측을 두고 이건 성공한 예측이네, 실패한 예측이네 라며 예측성공기준도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 ‘예측’의 정의를 논할 때 미래예측과 과학에서의 예측이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예측은, 특히 “미래예측”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나는 이 1장에서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왔던 ‘미래전망’,’미래예측’들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종교와 크게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2장부터는 위 2가지 질문을 다루기 시작하고, 그 중 첫번째로 ‘왜 근래의 미래예측은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다뤄질까?’ 라는 질문을 다룬다. 굉장히 신선한 질문이지 않은가? “미래상상도”를 그리면 대체로 우주도시, 높은 빌딩,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인공지능 등을 생각해내는 나는 “미래=과학기술의 미래”이 당연했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유토피아는 과학기술이 이뤄낼 것이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17세기 때 논의되었던 유토피아는 정치체제가 주요 담론이었고, 18세기에서는 종교가 주요 담론으로 나왔다고 한다. 물론 과학이 안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저 정치체제와 종교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만 나오니 내겐 굉장히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다르길래 그리 당연하게도 “미래=과학기술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오늘날 미래예측은 과학기술담론이 주를 이룰까? 책에서는 근대의 과학 역사를 사례로 들어 인류가 세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여러 예시를 들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예시는 1847년 미국 상원의원 대니얼 웹스터의 발언과, 1863년에 출판된 전신이야기였다. 1847년은 철도의 등장으로 교통의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고, 1863년은 1858년에 대서양 횡단 전신 해저케이블이 놓여서 통신의 격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우리는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다. 지금까지 세계는 이와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도 그렇고 어느 누구도 그 끝이 어디인지 아는 척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 하늘과 땅, 그리고 땅속의 것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지금을 놀라운 시대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과학적 연구를 생활을 위해 활용한다는 데 있다. 고대인들은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다. 현대인들도 지금 세대 전에는 이와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증기의 힘이 대양을 항해하고 육지를 가로지르고 정보가 전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는 정말 거의 기적적인 시대다. 우리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말할 수 없고, 우리에게 닥칠 일을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이 시대의 진보는 인간의 믿음을 거의 뛰어넘어 버렸다”
1847년, 대니얼 웹스터
“전신 케이블이 깔린 것은 당연하게도 금세기 일어났던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제 거대한 작업이 끝났으니 온 지구가 전류에 휘감겨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으로 고동칠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863년, 전신이야기
산업혁명과 교통혁명, 통신혁명 등 과학과 기술은 유례없는 진보를 인류에게 선사했고, 사실 이 물결은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삶의 기반이 이제는 과학과 기술 없이는 유지되지 못하게 되었고, 오늘날 많은 미래예측의 중심에 과학기술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2045! 특이점이 온다!” 라던가, “인공지능, 어느 일자리가 살아남을 것인가” 라던가, “게놈지도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암 정복!”라던가 등등.
과학기술이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막강한 과학기술 중 어떤 기술이 살아남고 진보를 이뤄낼 것인가? 과학기술이 선사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다면 앞으로 미래 기술은 무엇이 될 지,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을 것인지 예측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책은 벨의 전화기, 진공관의 사례를 들어 기술이 꼭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발명가가 도전하더라도 실패할지, 성공할지 모를 뿐더러 설사 성공하더라도 발명가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다시 1장의 “미래 예측은 절대적일 수 없다”로 돌아가게 된다.
3장이 특히 ‘야밤의 공대생 만화’처럼 재밌는데, 여러 발명의 뒷이야기를 사례로 다룬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하게 된 것은 사실 자신이 사랑하는 학생의 장인어른이 Telegraph multiplexing 기술 개발을 결혼 조건으로 걸어서 이걸 발명하다가 같이 전화를 발명해버렸다던가, 그런데 그 전화가 당시에는 시장성 제로(아예 기존에 없었던 신기술이라) 였어서 장인어른이 이걸 뭘 특허에 넣냐 면박을 줬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제대로된 기술 예측도, 그걸 기반으로 미래 예측도 못하는 주제이면서 열심히 미래를 확신하려고 하는 셈이다 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미래예측이 어떤 내러티브를 갖춘 채 전달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누가 하는 미래예측이며, 누가 등장하는 미래예측인가?’ 이라는 질문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하는 미래예측인가?
저자는 여기서 ‘경협하는 미래’라는 키워드를 꺼낸다. 오늘날 세상이 흘러갈 미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저마다 각자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수많은 미래 중 하나가 선택되거나 조합될 것이며, 결국에는 미래를 이야기하지면 사실상 현재를 두고 다투는 셈이다라는 걸 시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과학기술은 기업, 국가 단위의 대규모 R&D 투자를 동력삼아 굴러간다. 18세기, 19세기처럼 취미로 과학하는 사람 한 둘이 과학기술을 이끄는 것이 아닌, 조직화되고 막대한 재원 그리고 대규모 인력이 과학기술을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할까? 당연히 장밋빛 미래를 그려내줘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정부, 산업계, 학계, 언론에서 내놓는 공식 미래 전망에 포함되는 과학기술과 그렇지 못한 과학기술이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한다. 미래는 절로 굴러들어 오는것이 아니라, 선택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등장하는 미래예측인가?
저자는 왜 많은 미래예측들이 개인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2199년, 김갑수씨가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 하우스는 자동으로 그의 취향에 맞게 어쩌고 저쩌고…”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과학기술이 어째서 이리도 사회와는 괴리된 채 개인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이 지점에 의문을 표하며 일부 전문가가 주도하는 예측의 영역을 벗어나 폭넓은 사회적 논쟁의 영역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한다. 고도화되어가는 기술세계에서 이를 모르더라도 논쟁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는 그리 동의하지 못하겠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탈원전 논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정부 지지자들은 원전에 대한 기반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탈원전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원자력 관련 종사자들을 원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까지 지지하고 있는데, 그 덕에 우리나라 원자력 관련 연구 분야는 박살이 났다. 현재 서울대 2019년 원자핵공학과 입학 경쟁률이 0.7대 1이었으니 앞으로 10년 후 국내 원자력 분야 연구 인력 수급에 빨간불이 켜진 셈이다.
기술 분야에서 일하게 될 입장에서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이 필연적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는 오늘날 미래담론을 논쟁의 대상으로 옮겨와야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쉽게 동의되지 않는다. 이렇듯 나 또한 공학 분야의 종사자로서 여러가지 미래상 중 원하는 미래를 선택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책은 참 좋다. 오늘날 난무하는 미래예측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길러주고, 그럼으로써 기술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한다. 나는 ‘경협하는 미래’라는 아이디어가 무척 인상 깊었는데, 이는 미래를 개척해나갈 힘이 각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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