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읽고

blueshirt 2019. 6. 8. 09:11

기록되지 않은 노동 : 숨겨진 여성의 일 이야기

기록되지 않아서
그들 스스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일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의 기록되지 않은 노동: 숨겨진 여성의 일 이야기

나는 페미니즘을 논할 때면 노동과 육아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논의 대상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런 논의를 촉발시킨 기저에는 여성 노동자의 경력 단절과 그 주요 원인인 육아가 있기 때문이다.

관행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육아는 여성의 몫이었다. 오늘날 육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으나, 90년대생 기준 내 경험 상 유치원생, 초등학생 때 평일에 친구 집에 전화를 걸면 친구 혹은 어머니가 받았지, 아버지가 받은 기억은 없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노동자의 경력 단절을 낳았고,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숙련된 노동자의 경제활동 이탈을 낳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스스로의 부정피드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회사 측에서는 뽑아놓은 사원이 이제 좀 일에 익숙해지나 싶으면 회사를 나가게 되는 상황인 것이요, 회사를 나간 사원은 이제 최소 7, 8년의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경력이 공백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기껏 회사가 투자한 사원이 충분한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나갈 운명이라면 누가 뽑겠으며, 동년배의 경력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7, 8년간 일을 손에서 떼고 있었던 사람을 누가 뽑겠는가? 이런 연유로 육아는 경력이 단절된 여성 노동자의 재취업 영역을 저숙련 노동으로 제한시키는 한편, 아직 육아를 시작하지도 않은 여성 노동자의 취업 또한 제한시키는 결과를 만든다.

노동의 제한은 단순히 일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넘어서, 일을 하는 사람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키곤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 가치 창출’ 라는 구호를 외치고, 가르치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노동의 대가인  ‘월급’이 얼마나 그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노동을 한다고 하여 그 노동이 가치 없고, 그 노동자가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곤 한다.
육아로 인해 저숙련 노동자로 경제활동이 제한되는 여성 노동자는 사실상 육아로 인해 적절치 못한 대우를 받게 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보고 겪으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어린이들, 청년들, 그리고 어른들이 이 상황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왜 적절치 못한 대우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저버린 채 그저 그 상황에만 익숙해지니,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에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성평등을 위한 운동이고 여성 인식에 대한 변화를 이끌기 위한 운동이라면, 노동과 육아에 대한 논의는 다른 논의들에도 적잖은 파급력이 있을것이요, 그만큼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논할 때면 ‘노동’이라는 이슈가 다른 논의들만큼 사회적으로 활발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내가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미 활발히 다뤄지고 있고 그걸 안다면, 사실상 이 서평은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므로 괜히 시간낭비하지 않길 바란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기사를 접할 때면 여성혐오사례, 성추행/성폭행 등에 대한 범죄 등이 주로 기사로 나오지 노동이라는 주제가 집중 조명되어지는 사례는 드물다. 그나마도 여성할당제 혹은 유리천장, 육아휴직이라는 개별적인 사안으로 다뤄지고, 노동 문제는 따로 노동계에서 다뤄진다.

왜 여성-노동 주제가 활발히 다뤄지지 않은 것일까? 두 달 전 운이 좋게도 난 이 책에 대한 서평글을 읽었다. 이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국회도서관 국회기록보존소 기록연구관인 김장환의 국회도서관 금주의 서평 - ‘망각과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라는 글이었는데, 서평의 첫 문장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숨겨진 여성의 일 이야기. 이 책의 부제이다. 숨겨진(정확하게는 숨겨질 수 밖에 없는) 여성의 노동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여성 노동자가 모인 작은 모임에서 그들의 노동을 스스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논의보다도 앞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기록이 부족했다. 나는 노동이 제한된 여성의 노동 현실이 어떤지 알지 못했고, 직접 자신들의 일을 수필로 기록한 이 책이 그들의 노동 현실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이 책,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첫 장은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흔히 ‘아가씨, 아줌마’로 불리우는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야쿠르트 아줌마, 안내 및 행사 도우미, 톨게이트 노동자 등을 다루고 둘째 장은 오늘날 복지국가를 외치는 대한민국의 돌봄노동을 다룬다. 셋째 장은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 부당해고, 생존문제, 장애 여성으로서 겪는 일터의 경험 등을 다루고 넷째 장은 소수자 여성(비혼모, 여성이주노동자, 여성시각장애안마사)의 일할 권리를 주장한다. 다섯째 장은 노동을 공론화하고 노동권보장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인만큼 이 책을 읽기 전에, 노동자라는 신분이 보장하는 혜택 과 권리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두고 읽으면 좋다. 책에서 다루는 많은 직종들의 문제가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고용계약 문제이며, 실제로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용계약을 고용주가 해주지 않아서, 혹은 법에서 해당 직업을 노동으로 정의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문제들이 자주 나온다.  고용계약, 4대보험 등이 책에 자주 나오는데 나는 누군가와 고용계약을 맺고 일해본 적이 없어서, 4대보험도, 노동3권 같은 것들도 몰랐다. 만일 찾아보고자 한다면, 노동3권과 4대보험 정도 위키백과에서 찾아보길 권장한다.
모르고 읽는다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이 없는 미개한 이들의 언행에 기가 차게 될 것이고, 알고 읽는다면, 양심 없는 고용주들과 노동을 노동이라 인정하지 않는 시스템에 탄식을 하게 된다.

그런 언행과 탄식을 몇가지 이야기해보자면,
행사 선물을 준 행사도우미에게 “언니는 안 주나? 다른 건 안주나?” 라며 능글 맞게 성희롱을 하는 아저씨, 여성대리운전기사에게 “하루에 얼마 버냐, 내가 그거 줄 테니까 놀자” 이러는 취객, 톨게이트 비용 100원을 더 많이 정산했다고 톨게이트 근무자에게 계좌이체를 거부하고 ‘시화호’까지 와서 100원을 내놓으라는 운전자, 월급명세서를 주지 않는 산모도우미 관리 회사, 추가 수당을 주지 않고 돌봄교사를 주말에도 근무시키는 학교, 15년 전 학생 1명당 3만원 받았던, 지금은 학생 1명당 2만원 받는 방과후 교사, 업무의 경계가 없어 장애인의 잡부로 전락해버리는 장애인활동보조인, 24시간 간병 기준 6만원 일당에 산재보험을 포함한 4대보험을 보장받지 못하는 간병인, 요양보호사에게 자신을 씻길 때 맨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라는 남성 환자,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노동위원회에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는 요양보호사.
이외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염치없는 사람들, 제도적으로 탄식이 나오는 상황들이 책에 꾹꾹 쓰여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니 분개할 현실이다. 이 책은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이 3년간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16년도에 출간한 책이다. 출간한 지 3년이 흐른 19년도 지금은 얼마나 개선되어 있을까.
몇가지 이야기를 해보자면, 2009년부터 용역으로 전환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정규직 전환과 관련하여 7년간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2017년 1,2심에서 모두 승소하였지만, 현재 3심이 대법원에서 2년째 계류 중이며, 그 사이 한국도로공사는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요양보호사는 여전히 근로기준법 11조 1항에 의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8대 국회부터 개정안 및 가사노동자법이 발의되어왔지만, 처리되지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되어왔다. 현재 20대 국회에서도 계류중이다.

책의 추천사에는 이런 희망이 적혀있다. ‘누군가에게는 더 파고들 현장으로, 누군가에게는 노동 현장에서 소리 내는 용기로, 누군가에게는 부러뜨린 연필을 애써 다시 쥐는 계기로, 누군가에게는 외롭지 않다는 위로로 ……”
희망을 적은지 어언 3년, 소망했던 희망 중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망들을 이제는 책 속의 글이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가 하면,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 속 여성차별과 익숙해져서 의식하기 힘든 미소지니(misogyny)가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공론의 장으로 올라오고 있고, 우리는 비록 갑론을박할 지 언정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여성 차별적 언행인지, 미소지니인지 의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고, 주로 그런 것들이 오늘날의 논의 대상이 되지만, 우리는 왜 그런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오늘날의 여성차별적 분위기를 만들었고, 왜 우리는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말이다. 나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꾹꾹 눌러 쓰여진 이 책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의 관점에서 여성차별, 미소지니를 바라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왜 페미니즘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참고한 것들을 따로 적습니다.

1. 비혼모 : 참고로 미혼모의 미혼(未婚)은 언젠가 마땅히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직’ 하지 않았다는 뜻인데다, 그런 여성이 아이를 낳고 ‘모(母)’가 되었다는 도덕적 비난이 내포되어 있어 ‘비혼모’라는 용어로 바꿔부르자는 움직임이 있다. (출처 : https://withgonggam.tistory.com/2081 )

 

미혼모, 비혼모, 한부모 _ 김희경(논픽션 작가)

최근 나는 아동인권을 옹호하며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상한 정상가족』이라는 책을 썼다. 가족 안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놓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오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자고..

withgonggam.tistory.com

2. 노동3권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출처 : 국세청 용어사전)

3. 4대보험 :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출처 : 4대사회보험정보연계센터)

4. 근로기준법 11조(적용범위) 1항 : 이 법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 다만, 동거하는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과 가사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5. 미소지니(misogyny) :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류의 일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보다 열등한 제 2의 성으로 인식하는 모든 언어와 행동" 여성혐오는 단순한 '취향적 불호'보다는 광범위한 뜻으로 제도적인 성차별, 여성에 대한 경시, 편견 및 고정관념,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타자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 (출처 : Amnesty 블로그 칼럼 / 더 지니어스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