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 글

[11] 군대

blueshirt 2018. 6. 3. 21:02

[11] 군대

방을 뺍니다.

관악에 자취를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이 되어갑니다. 입학 초 통학을 하겠다며, 두 달 동안 호기를 부리다 제풀에 지쳐 자취를 결정했었지요. 집에 제 방이 있었던 적은 있지만, 제 방이 집이 되어본 적은 없어서 무섭기도 했습니다. 자취를 시작한 지 근 2주 정도 집에 아무도 없는 사실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이틀에 한 번꼴로 인천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조금씩 그 간격이 벌어져만 가다가 근래에는 한 달에 한 번, 삼 주에 한 번 정도 가곤 했던 것 같습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부모님은 ‘독립’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침잠에서 일어나 해를 맞이하면서부터, 저녁 너머로 밤이 떠오를 때까지 온전히 제 생활에 집중해보라고 말씀해주셨지요. 좋았습니다. 통학할 때보다 2시간은 더 잘 수 있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들어와도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학교에서 차가 끊겨도 걸어올 수 있는 거리에 집이 생겼으니까요. 가족끼리 우스갯소리로 '박재연 인천 본점’, ’박재연 서울 지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실 말이 독립이지, 어찌 보면 전 대학생이 되었다는 이유를 빌미 삼아 더 큰 그늘막을 요구했던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보증금도, 월세도 부모님이 내주셨으니까요. 참으로 죄송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19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20년은 제가 25살이 되는 연도입니다. 전역하는 해이기도 하지요. 흔히들 반오십이라고 불리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오십이란 숫자는 나이에 있어서 지천명이라고도 하지요.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고요. '25살이 되면 그 뜻의 절반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될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그보다도 늦었다는 생각에 위축되기만 할까 걱정이 듭니다. 무엇에 늦었다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이는 4년제를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 나이. 복수전공도, 부전공도 없는 공대생 3학년, 막 제대한 25살이라는 단어들이 저를 간략하게 표현하겠지요. 그런 단어들이 제가 저 자신마저 간략하게 만들까 걱정이 듭니다. 아직은 먼일 같아 지금은 크게 걱정되지는 않지만 아마 2019년 말, 2020년 초가 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저를 재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단어들은 사실 그 자체로 어떠한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서술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가 스스로 늦었다고 생각하기에 위축되는 것일 겁니다. 흔한 말이지만, '삶은 경주가 아니다.'란 말이 있지요. 자주 잊곤 합니다. 아마 그것은 경주가 아닌 길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혹은 생각해보아도 그 첫발을 내디뎌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녀 이미 대로가 되어버린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종종 그 많은 인파와 경주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일텝니다.
강남역에는 12개의 출구가 있다죠. 강남역 지하 한복판인 2호선과 신분당선 사이에 서면 단 두 개의 트랙만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북쪽을 향해 걷는 사람들과 남쪽을 향해 걷는 사람들만의 트랙 말이지요. 두 무리를 가르는 기둥 앞에 서면 꼭 누가 빨리 2호선을 타나, 신분당선을 타나 경주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사람들은 1번, 2번 등의 각자의 출구 혹은 지하철을 탈 것이고, 그들은 같이 걸었던 옆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제게 주어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 목표는 '1. 건강히 군대 갔다 오기. 2.영어단어, 독해력 늘려오기'입니다. 많은 목표를 잡지 않으려고요. 사실 이것도 큰 목표일 것 같습니다. 하나씩 해보고 다른 목표를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책을 읽고, 여러 고민을 하고, 고민을 글로 쓰다 보면 가능하려나..? 라는 작은 질문 정도의 다짐이 섭니다. 일단 해봐야 알겠지요.

서울역에서 많은 기차들이 멈춰 서고 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강남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걷지만 각자의 출구로 걸어 나가는 것처럼, 일단은 움직이고 주변을 둘러보고 이 출구, 저 출구 발을 얹어 봐야겠지요. 

건강히 아프지 않고 잘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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