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 글

[10] 필사하기

blueshirt 2018. 5. 22. 21:47

[10] 필사하기

군대를 간 친구 중, 필사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문장들을 정리하고 외워두기 위해서 필사를 한다고 했다. 내게도 필사를 추천해줬는데, '언젠가 필사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근래 '격몽요결'이라는 책을 필사했다.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가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하여 지은 책이다. 이제 막 학문에 입문하는 학생들을 위함이니, 오늘날에 치면 아마 초등학교 입학생 정도가 읽은 책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책을 23살이 된 애가 읽고 있다.

약 1~2주 전, 강릉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2박 3일 간 여행을 갔었다. 시장에 들르고, 해변가도 가보고, 해변도로도 달려봤는데, 그 중 내게는 '오죽헌'이라는 곳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오죽헌'. 이름만 들어봤던 곳이라 생각했는데, 아마 중학교 때 혹은 초등학교 때 와보았던 곳 인 듯 했다. 기념관이며, 검은 대나무이며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가인데, 가옥을 모두 돌고, 기념관에 가니 아래와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조금은 다를 수 있는데, 아래의 의미와 같은 문장이었다.)

"학문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현묘한 것이 아니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에 나온 문장으로, '서울에 돌아가면 즉시 이 책을 필사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친구들과 헤어진 뒤 나는 서울역에서 나와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 커다란 서점에서 '격몽요결'이라는 책이 많이 있지는 않았다. 두 권 있었는데, 한 권은 천자문 학습 목표로 쓴 책이요, 다른 한 권은 격몽요결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아니라, "율곡이 말하시길 ~~~ . 이것은 ~~ 뜻이다." 이런 식의 해설문구로 쓰여 있는 책이었다. 원문을 읽고 싶었지만, 한자는 잘 알지 못해서 원문을 한글로 옮겨적은 글을 읽고 싶었고, 결국 인터넷에서 그 글을 찾아 필사하기 시작했다. (링크)

필사하기까지 1주일 정도 걸렸다. 책은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가정/상/제사 부분을 제외하고 옮겨적었다. 가정과 상, 제사 부분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적지 않았다.

격몽요결을 읽으면서 마음에 남는 문구가 몇가지 있다.  

1. 초학자들이 학문의 올바른 방향을 알지 못하고 또 견고한 뜻 없이 대충대충 배우고서 더 가르쳐 주기를 요구하면 피차 간에 도움됨이 없고 도리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다.
2. 학문을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 속에 있다.
3.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들을 것을 생각한다.
4. 언어를 신중히하여 일동일정을 가볍고 소홀히하여 구차스럽게 지나쳐 버려서는 안된다.
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것은 마음을 수양하는데 가장 해롭다. 마땅히 말을 가려서 하고, 신중히 하여 때에 맞은 뒤에 말하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이 간략한 자가 도에 가깝다.
6. 마땅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게 하여야 할 것이니,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드러난 곳에 있는 것처럼 하고, 혼자 있더라도 여럿이 있는 것 처럼 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푸른 하늘의 밝은 해를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7. 매일 자주 스스로 점검하되, 마음을 보존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학문이 진전되지 않음이 있었던가, 행실을 힘쓰지 않음이 있었던가 반성하여 있으면 그것을 고치고 없으면 더 힘써서, 부지런히 힘써서 게을리 하지 말아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8.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한 책을 익숙히 읽어서 의미를 다 깨달아 꿰뚫어 통달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다시 다른 책을 읽을 것이요, 많이 읽기를 탐내고 얻기를 힘써서 바삐 섭렵해서는 안된다.
9.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버이를 섬기기를 오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 함이 옳다.
10. 가장 해서는 안될 것은 배운 것을 믿고 스스로 고상한 체 하며 기운을 숭상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11.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인다는 뜻을 가슴속에 두는 것이 옳다.
...
등등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고, 각 장마다 필사를 하면서 한 번 읽고, 필사한 문장들 중 나에게 인상 깊었던 문장을 밑줄치기 위하여 한 번 더 읽었다. '필사'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해보니, 기존의 '독서'와는 그 느낌이 많이 달랐는데, 일단 한 문장을 읽으면서도 곁가지 생각들이 많이 들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을지, 저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인지, 오늘날에는 잘 맞는지. 이런 것들이 떠오르곤 했다.

이번에 필사한 격몽요결에 '함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함영'이란 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함을 뜻한다. 필사는 '함영'의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