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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 글

blueshirt 2017. 4. 14. 18:22

휴학을 하고, 하루는 강남역에 한동안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2호선을 타고 역에 도착해 교통카드를 찍고 나오면, DX line이라 적혀 있는 이정표가 있는데, 그 이정표 따라 신분당선으로 넘어가는 길목 계단에 앉아 있었다. 목적 없이 왔던 지라 그저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문득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였다.

배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 서류 가방을 들고 급히 뛰어가는 사람들, 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가는 사람들, 뭐 이외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배가 고픈 사람들은 음식점이 많은 11, 12번 출구로, 직장인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높은 빌딩들이 있어보이던 1, 2번 출구로 혹은 2호선으로, 학생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독서실, 재수학원 등등이 있어보이던 5번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아마 자신이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제 각각 자기 갈 길이 있는 사람들이 목적지가 다른데도, 다들 강남역이라는 같은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지도 앱만 보더라도 자기 갈 길 서너개는 골라주는 오늘에, 이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곳을 향해 가면서 여기 한 곳을 같이 지나간다는 점이 신기했다.



대학 입시 때 처음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방향을 결정하라는 말을 담임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나를 표현해야 하는, 장당 약 1,500자 정도의 자기소개서 세 장에는 아직 방향이란 없었고, 그럴 때면 종이는 빈약해 보이기 일 수 였다. 여러 번 갈아 엎어지면서, 이타적이며, 배려심이 많고, 능동적이며, 주도적인 사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당한 무언가를 삶의 방향이라고 자기소개서에 적었다.

대학 입학식 자리에 앉아 "여러분, 삶의 방향을 찾으십시요." 라는 교수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다. 당시 축사를 해주시던 교수님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도서의 저자, 김난도 교수님이었다. 축사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겨울방학을 무료히 시간을 보내고 갓 입학한 나에게 당시에는 꽤 동기부여의 단어들이었다.

얼핏 보아도 1,000명은 넘어보이는 학생들 앞에서, 교수님은 목소리의 흔들림 없이 축사를 읽어나가셨는데, 아마 교수님은 교수님의 방향을 스스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많은 학생들 중에서 나는 맨 앞도, 맨 뒤도, 그렇다고 옆으로 나가기 쉽게 복도 끝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치고 나가지도, 뒤로 빠져나가지도, 그렇다고 옆으로 튀어나가기도 애매한, 딱 자기소개서의 위치 정도에 앉아 있었다.



지금 자기쇅서를 다시 쓴다면, 나는 어느 정도 쓸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아직 목적 없이 이곳 저곳 돌아디는 것을 보면, 그다지 대학교 입시 때 고민하던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취미 생활이 늘었고, 별 볼일 없어도 글 써보는 걸 다시 좋아하게 되었으며, 가구를 살펴본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와 같이 아직은 자기소개서에 쓸 법하지 못한, 내가 하고 싶었던 작은 점들을 알게 되었다. 차차 그런 점들이 모이면, 그제야 방향이 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렇게 휴학을 하고 서울대입구역 앞을 종종 나와 보면, 강남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아마 길목 계단 즈음 앉아 있는 나와는 다르게 각자가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